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알렉산더 (문단 편집) === 7년 전쟁 === 1748년 전쟁이 종식된 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프랑스로부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돌려받았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1756년까지 활동하며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해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던 1757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카를 알렉산더를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가 4월 30일에 보헤미아에 도착했을 때, 프로이센군은 이미 보헤미아 침공을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프라하]]에서 병력을 끌어모으면서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의 군단의 합류를 기다렸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운 백작이 오기 전에 승부를 보기로 결심하고 5월 6일 [[프라하 전투]]를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는 전투 도중 기절해 프라하 요새로 이송되었고, 그 대신 브라운 장군이 지휘해 프로이센군에게 막심한 피해를 입혔으나 도중에 그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바람에 통제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군이 브라운 장군의 복수를 하겠다며 섣불리 공세를 개시했다가 프로이센군에게 측면이 공략당하면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카를 알렉산더는 요새 수비에 전념하다가 다운 백작이 [[콜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격파하고 프로이센군이 본국으로 철수를 개시하고 나서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57년 가을, 오스트리아군은 슐레지엔 공세를 개시했다. 카를 알렉산더 휘하의 유능한 지휘관들은 그에게 승전을 여러 차례 안겨줬다.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은 11월 12일 슈바이트니츠를 점령했고, 다운 백작과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장군은 11월 22일 [[브레슬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를 공략했다. 그러나 카를 알렉산더는 12월 5일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완패당했고, 기껏 탈환했던 브레슬라우도 프로이센에게 도로 빼앗긴 뒤 보헤미아로 철수해야 했다. 이후 형수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질 수 없는 싸움을 졌다"는 문책을 받은 그는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났고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가 신임 원수로 취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